바이오스펙테이터 서일 기자
왜 미국에서 신약이 개발되는 것일까? 그 힘의 기반은 정말로 신약을 개발하고 싶었던 의사, 과학자, 경영자와 같은 ‘사람’이 미국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신약을 개발하고 싶었던 의사이고, 과학자면서, 경영자였던 로이 바젤로스(P. Roy Vagelos)의 이야기이다.
왜 미국에서 신약이 나오는지를 물으면, ‘미국에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거대한 자본을 가진 제약기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이 돌아오고는 한다. 어떻게 미국 제약기업은 거대한 자본을 갖게 되었는지 물으면, ‘미국 제약기업은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신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질문과 답과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이런 분석에서 통찰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책을 따라가며 로이 바젤로스의 꽤나 낭만적이었던 도전과 끊임없이 저지르는 실수, 그럼에도 다시 도전하고 결국 매번 벽을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 그의 낭만과 열정의 밑바탕에는 가족과 사회와 공동체와 인류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라는, 너무나 뻔해서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무엇보다 강력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가장 미국적이었고 여전히 인간적인 동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픈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가장 평범하지만 잊기 쉬운, 그래서 가장 위대할 수 있는 진리 말이다.
머크를 아시나요?
1930년부터 발간된 경제잡지 『포춘(FORTUNE)』은 1955년부터 ‘포춘 500’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 가운데 매출 기준으로 상위 500개 기업을 뽑는 것이다. 1955년부터 2024년까지 ‘포춘 500’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기업은 49개였는데, 머크는 이 49개 기업 안에 들어갔다. 『포춘』만큼 저명한 경제 잡지인 『포브스(FORBES)』도 비슷한 일을 한다. 2003년부터 전세계 기업을 상대로 상위 2000개 기업을 뽑는 ‘포브스 글로벌 2000’이다. 2023년 『포브스』는 20년동안 이 명단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던 기업들로 명예의 전당(Global 2000 Hall of Fame)을 만들었다. 모두 648개 기업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는데, 머크는 여기에도 들어갔다. ‘포브스 글로벌 2000’이 시작된 이래 머크가 10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지만, 100위 밖으로 나간 적도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명예의 전당에 애플과 아마존도 헌액되었는데, 첫 ‘포브스 글로벌 2000’에서 애플은 963위, 아마존은 1178위였다.
머크, 정확하게 메르크는 독일에서 시작했다. 메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야코프 메르크(Friedrich Jacob Merck)는 1668년에 약국 한 곳을 인수했다. 메르크 가문은 이 약국을 제약 및 화학 기업으로 발전시켰고 1891년에는 미국에도 진출했다. 미국 머크인 ‘머크 앤드 컴퍼니(Merck & Co./MSD)’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1914년에 1차대전이 터졌고,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독일은 적국이 됐다. 미국 정부는 독일계 기업인 머크 앤드 컴퍼니를 몰수했다가 1차대전이 끝나자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메르크 가문의 조지 W. 머크(George W. Merck, 1894~1957)가 이를 인수했고, 미국 머크는 신약을 쏟아내는 전 세계적 규모의 제약기업으로 성장해갔다.
로이 바젤로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2024년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의약품은 머크의 면역항암 신약 '키트루다(Keytruda, 성분명: 펨브롤리주맙)'였다. 같은 해 머크의 매출은 650억달러(약 89조원) 정도였는데, 키트루다라는 신약 1개의 매출이 약 290억달러(약 40조원)를 차지했다. 머크가 신약개발에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업이 정말로 진심인지는, 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머크가 2024년 1년동안 R&D에 쓴 돈은 180억달러(약 24조원) 정도였다. (참고로 2024년 대한민국 정부의 전체 R&D 지원 예산은 전년 대비 15% 정도 줄어든 약 26조원이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지만, 돈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머크의 CEO는 전체 매출의 1/4에 달하는 돈을 어떤 R&D에 어떻게 쓸 것인지 2024년에도 끊임없이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기업의 CEO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로이 바젤로스(P. Roy Vagelos)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머크의 CEO를 지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심혈관계 의사였다. 그런데 대체 군복무를 하러 갔던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에서 콜레스테롤 생합성 과정을 연구하는 생화학자가 되기로 한다. NIH에서 자신의 연구팀을 이끌던 그는 다시 워싱턴대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그 어렵다는 대학 개혁에 나선다. 그리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즈음,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 연구소로 간다. 그가 머크 연구소로 갈 당시만 해도 A급 과학자들이 기업연구소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 연구소에서 연구소장을 지내다가, 나중에는 머크 CEO 자리에까지 올랐다.
로이 바젤로스가 CEO를 하는 동안 머크의 연매출은 35억달러에서 105억달러로 늘었다. 그는 의사라는 경험과 콜레스테롤 생합성 과정을 연구한 생화학자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고 콜레스테롤 혈증 치료제 개발분야에서 '스타틴(statin)' 혁명을 이끌었다. 스타틴 계열 치료제들은 기존 치료제들과는 다른 접근법으로 개발된 신약이었는데, 이는 이후 머크의 신약개발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꿀 만큼 효율적인 것이었다. 물론 스타틴 계열 신약들은 약효에서도 기존 치료제들을 압도했다.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에서 스타틴 계열 신약개발을 맨 앞에서 지휘했고, 머크는 빠른 시간에 블록버스터 의약품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라는 기업을 더 강력한 R&D 중심 기업, 신약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제약기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이미 위대한 기업이었던 미국 머크를, 더 위대한 기업인 글로벌 머크로 도약시킨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CEO 로이 바젤로스에 대한 이야기다.
따뜻한 혁신가, 과학을 하는 CEO..하지만 가장 평범했던 미국인
『메디신, 사이언스 그리고 머크 - 로이 바젤로스의 가장 미국적인 신약개발 이야기』는 로이 바젤로스의 자서전이다. 1929년 평범한 그리스 이민자 가정에서 바젤로스라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로 여겨지기도 하는 1960년대 미국 과학계가 매일매일 놀라운 성취를 이뤄냈던 이야기, 그리고 같은 시기에 차별받던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려 노력했던 미국의 보통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준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지면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미국 기업들 가운데, 과학에 모든 것을 걸어 위기에서 벗어난 머크라는 제약기업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 제약산업의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정책적 실패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책은 바젤로스가 머크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약기업 가운데 한 곳인 머크 CEO에서 물러나자마자, 과학자로 돌아가 이제 막 시작한 작은 바이오텍에 뛰어든 이야기가 열리기 때문이다.
미국 현대사를 따라가며 말썽꾸러기 소년 로이 바젤로스가 의사가 되었다가 과학자가 되고, 다시 기업의 세계로 뛰어들어 어려움을 뚫고 신약을 개발하며 기업을 키워가는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바젤로스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가족과 공동체, 인내와 노력, 성실과 도전이라는, 이제는 귀해진 가치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이 동화처럼 읽히게 하는 데 한몫한다. 과학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동료 연구자들이 하나둘 노벨상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신약을 개발해 전 세계 최고의 제약기업을 키워가는 이야기는 잘 짜인 한 편의 영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맥티잔 프로젝트
CEO 바젤로스는 노동조합과 대립하기도 하고, 늘 논란에 오르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경영자였다. 그러나 경영학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의사이자 과학자 출신 CEO가 보여준 경영은, 오히려 원칙적이면서 과학적이고 꽤나 따뜻한 경영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유리 천장에 금이 가게 만들려고 어떻게든 최고 경영진에 여성 임원을 포함시키려는 노력, 유색인종 인재를 머크에 채용하려고 유색인종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에 후원 프로그램을 세팅하는 시도, 환경 당국의 규제보다 강한 오염물질 배출 기준을 정하고 전세계 모든 모든 머크 공장에 적용한 일, 사회주의 중국이 감염병 예방백신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말도 안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기술 수출을 한 사건들이 모두 로이 바젤로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는 맥티잔이 있다.
머크는 가축 기생충을 없애는 이버멕틴이라는 약물을 개발한다. 그런데 머크 연구소와 로이 바젤로스는, 숙주로 삼은 사람의 시력을 결국 잃게 만드는 미세사상충을 박멸하는 데 이버멕틴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에 최소 1800만명이 감염되어 있었고, 감염될 수 있는 사람이 8000만~9000만명에 이르렀던 어마어마한 공중보건 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머크 연구소장이었던 로이 바젤로스는 이버멕틴을 가지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의약품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매년 한 알만 먹으면 미세사상충을 예방할 수 있고, 투약만 계획적으로 잘 진행하면 기생충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맥티잔을 개발한다. 그러나 늘 돈이 문제다. 어떤 정부 기관, 공공 기관도 맥티잔을 구입해서 배포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이 없었다.
머크 연구소장으로 맥티잔 개발을 결정했던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 CEO가 되어서 맥티잔의 무상 공급을 결정했다. 누군가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마을에 맥티잔을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무료로 맥티잔을 주겠다는 결정이었다. 맥티잔을 개발하고,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허가와 승인을 받고, 공장을 지어 멕티잔을 생산하는 모든 비용은 머크가 부담하기로 했다. 로이 바젤로스가 이 책을 출간했던 2003년 기준으로 총 2억달러가 들어갔다는 이 프로젝트는, 1987년부터 2025년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픽션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어떤 의사의 이야기이고, 어떤 과학자의 이야기이며, 어떤 비즈니스맨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가 듣고싶어 하는 이야기이며, 다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야기이고,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 로이 바젤로스・루이스 갈람보스 지음 / 엄정원 옮김 / 바이오스펙테이터 펴냄 / 140*215mm / 568쪽 / 2025.06.20. / 값 35,000원 / ISBN 979-11-91768-10-7 03840 / 구매 문의 : book@bi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