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스펙테이터 김성민 기자
▲김승호 보령제약 창업주
김승호(93) 보령제약 창업주(회장)는 국산 블록버스터 혈압약 ‘카나브’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전혀 다른 답을 내놨다. 김 회장은 “신약개발은 제약산업의 절대적인 과제다. 당연히 해야 한다”며 “제약사가 신약개발을 하지 않으면 발전을 못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제약사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짧지만 강렬했다.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카나브 개발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을 물었다. 이번에 김승호 회장은 “굽이굽이 다 어렵죠”라면서 “(신약개발 과정에서 당연하게 거쳐야 하는) 그동안의 어려움은 얘기할 거 없고...”라고 끊었다. 한 시간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에서 김 회장은 “지금도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카나브를 더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라고 몇번이나 강조했고, “신약개발은 허가를 받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구순을 넘긴 그의 얼굴이 청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카나브의 개발스토리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1957년 보령제약을 설립한 창업주에게 과거의 옛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 회장의 눈빛은 지금껏 인터뷰했던 누구보다도 현재와 미래를 향해 있었고, 전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의 “제약산업을 하는 한 신약개발은 (그냥) 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신약개발이 멀리 높이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업(業)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담담함 속에서 더 빛을 발했다.
그럴듯한 합리적인 이유들에 파묻혀 좀처럼 듣지 못했던, 우리가 잊고 있던 메시지였다. 김 회장은 국내 생태계에서 신약개발을 어렵게 하는 자본시장 환경에 대해서도 “그건 지엽적인 사안”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내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신약개발을 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도 그의 답은 비범함보다는 평범함에 가까웠다.
한창 리노베이션을 진행중인 서울시 종로구 소재 본사를 찾은 자리에서 마주하게 된 김승호 회장의 모습은, 보령제약 그 자체를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했다. 어느새 자세를 바로하고, 몸을 기울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떠올린 그와의 대화 속에서, 자랑이나 무용담은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보령제약은 1992년, 지금의 카나브가 된 고혈압 신약개발을 시작했다. 카나브는 안지오텐신II 수용체 차단제(ARB) 계열 약으로, 당시만 해도 국내 환자들이 쓸 수 있는 고혈압 치료옵션은 칼슘채널 차단제(CCB)였다. 2010년대 중반부터 고혈압 시장에서 ARB 계열 약물은 CCB 약물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카나브는 2011년 국내신약 18호로 출시됐고, ARB 계열 고혈압약으로 유일하게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이었다. 글로벌에서 카나브는 ARB 계열 약물로서는 9번째로 시판됐다. 이미 국내에서 카나브 경쟁약물인 ARB 제제가 팔리고 있었지만, 카나브는 지금까지 혈압강하 효과와 7만건이 넘는 임상데이터 및 실사용데이터(RWE)를 쌓으면서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켜오고 있다. 현재 카나브는 단일제를 포함한 복합제까지 7개 제품군을 이루고 있고, 카나브 패밀리는 2023년 최대 매출액 1700억원을 기록했다. 보령제약은 2014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국가 등 총 32개국에 카나브를 수출했다.
그렇다고 카나브 개발과정이 수월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김 회장은 “신약개발은 예상했던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10년, 2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카나브도 개발하는데 20년이 걸렸고, 그 기간동안 계속해서 돈이 들어가야 한다”며 “개발하더라도 시장에 나오는 것은 1만개 가운데 1개”라고 설명했다.
"물론 신약개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할 수 있다면 응당 해야할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보령제약이 거쳐왔던) 약 배송 및 유통과 같은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약개발은 상당히 숙련되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덤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국내에 제약사가 300~400개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할 수 있는 회사라면 (당연히) 신약개발을 해야지 된다”고 강조했다.
신약개발 과정이 복잡하고 어렵지만, 가장 어려운 것으로 임상개발 과정을 꼽았다. 김 회장은 “의약품은 환자의 병을 낫게 해야 하고, (효능을) 확인해야 한다"며 "의사가 처방을 결정할 때 약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임상을 무지하게 많이 해야하고, 때문에 돈이 들어가고, 사람이 들어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카나브의 허가과정 막판에, 임상 데이터의 차이로 포기하려는 순간, 원료의약품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제개발 및 제조단계를 최적화해 상황을 돌파한 시행착오 과정도 있었다.
김 회장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만, 참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로...”라며 “그러나 각오를 해야한다. 만에 하나 오늘까지 (오랫동안) 약을 써왔더라도 부작용이 나오면, 바로 그날부터 쓰지 않아야 한다. 그게 의약품”이라고 말했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카나브 개발을 20년 넘게 끌어올 수 있었던 동력에 대해, 김 회장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명감”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내 일처럼 하라는 얘기를 한다. 남 일처럼 쳐다보면 일이 되지 않는다”며 “똑같다. 제약산업이 당연히 가야할 길은 신약개발이고, 사명감을 갖지 않으면 신약도 나오지 않는다. 거저 나오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런 사명감을 업계에 심어줄 수 있다면 국내 신약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연구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파해야 하는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김 회장은 또한번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그는 “이제 연구원이라면 제약산업이 신약개발을 해야하고, 신약개발이 그들이 해야하는 일이라는 사명은 다 알고 있다”며 “단지 그걸 (실제 행동으로)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1957년 보령약국을 차렸을 때로 돌아가서 다시 회사를 한다고 해도, 신약개발을 할 것인지 물었다. 김 회장은 “안 하면 안 되잖아요. 안 하면 누가하나, 내가 해야지”라며 “그건 주어진 것이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기업이라는 것은 이익을 창출해 이를 재투자해 발전시키는 것”이라며 “기업으로서 돈을 버는건 당연하지만, 돈만 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제약산업을 하면서 참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어쩌면 보령제약을 여기까지 오게 한 경영철학인 ‘1%의 양보론’을 전했다. 김 회장은 “조물주가 사람과 이 세상을 참 묘하게 만들었다. 모든 걸로 설명되지 않는게 사람이고, 만명, 십만명 똑같은 사람이 없다”며 “그 결과 모든 것이 양면성이 있고 같지 않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50:50 형상을 이루고 있고, 그러다 보니 의견이 맞서면서 사회갈등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이어 그는 “여기서 마음만이라도 1%를 양보하고 배려하면 갈등이 해결되고,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며 “1%의 배려라는 논리가 서지 않으면 살벌해서 못 산다. 결국 양보를 하면 더 크게 돌아온다”고 했다.
※이 기사는 한국제약바이오협회 8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신약개발 스토리북(가제)' 제작에 활용될 예정입니다.